하이데거의 도구 존재론과 기술의 본질
하이데거는 기술을 단순한 도구가 아닌 세계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이해했다. 그는 『기술에 대한 물음』에서 기술이 단순히 인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며, 오히려 세계를 특정한 방식으로 조명하는 ‘개시의 방식’이라 주장한다. 기술은 사물과 인간, 자연을 일정한 질서로 배치하며 이를 통해 인간의 인식과 존재 방식을 결정짓는다. 예컨대, 현대 기술은 자연을 에너지 자원으로, 인간을 생산성과 효율성의 단위로 환원시킨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기술의 본질을 ‘게슈텔(Ge-stell)’이라 명명하면서, 기술이 세계를 강제적으로 구성하는 틀로 작동한다고 보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술이 인간의 의도를 따르는 수단이 아니라는 점이다. 기술은 오히려 인간이 그것에 의해 사고하고, 존재하고, 행동하도록 조건지운다. 이 관점에서 기술이 인간을 대체할 수 있는지 묻는 것은 기술을 단순한 수단으로 오해한 결과일 수 있다. 기술은 이미 인간의 존재 방식을 변형하고 있으며, 이 변화는 단순한 기능의 대체 이상으로 존재의 해석 구조를 바꾸는 것이다.
노동의 소외와 인간 본질에 대한 마르크스의 통찰
마르크스는 산업화 과정에서 노동이 기계화되면서 노동자가 자신이 만든 결과물과 단절되는 과정을 '소외'라고 표현했다. 이는 인간이 자신을 실현할 수 있는 본질적인 활동으로서의 노동이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단순히 생계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면서 발생하는 문제였다. 현대 기술이 인간 노동을 대체하는 과정에서도 이와 유사한 현상이 발생한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반복적 판단과 창의적 결정까지 흉내 내는 지금, 인간은 점점 더 기술 시스템에 종속된다. 마르크스는 기계화된 생산 구조 안에서 인간이 소외되고 비인간화되는 양상을 예견했다. 이는 단순히 일자리를 잃는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더 이상 주체로서 의미를 부여받지 못하고 체제의 일부로 기능화된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기술이 인간을 대체할 수 있다는 담론은 결국 인간의 고유한 활동과 의미 부여의 과정을 부정하는 철학적 전제와 연결된다. 마르크스의 입장에서 보면, 기술은 인간의 해방이 아니라 또 다른 종속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베르그송의 직관 철학과 기계의 한계
베르그송은 인간 사고의 핵심을 ‘직관’이라 불리는 비이성적이고 연속적인 감각의 흐름으로 이해했다. 그는 『창조적 진화』에서 삶은 논리와 계산으로 환원할 수 없는 창발적인 흐름이며, 시간은 단순히 양적으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체험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반면 기계나 알고리즘은 시간과 경험을 정량화하고, 논리적으로 재구성하는 방식에 익숙하다. 인공지능은 과거의 데이터를 학습해 미래를 예측하는 방식이지만, 인간은 이전에 없던 감각, 감정, 직관을 바탕으로 새로운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이는 기계가 절대로 모방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능력이다. 베르그송의 관점에서 보면 기술이 인간을 전면적으로 대체한다는 주장은 시간과 삶, 존재에 대한 매우 제한적인 이해에 기반하고 있다. 인간 존재는 단순히 판단하고 실행하는 시스템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성되고 변화하는 유기적 흐름이다. 기계는 인간을 보조할 수는 있지만, 결코 그 흐름 자체가 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