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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주의는 어떻게 일상 속에서 자라나는가 — 권력과 복종에 대한 철학적 탐구

by simplelifehub 2025. 8. 21.

악은 특별하지 않다, 그것은 무사유의 결과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 재판을 지켜본 뒤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그녀는 나치 전범으로 지목된 아이히만이 어떤 사악한 괴물이 아니라, 매우 평범하고 사무적인 인물이었음을 강조한다. 그는 단지 명령을 따랐을 뿐이며, 자신이 한 일의 도덕적 무게에 대해 깊이 사유하지 않았다. 아렌트가 지적한 것은 바로 이 '무사유 상태'가 전체주의적 악을 가능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전체주의는 거대한 음모나 광기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사소한 복종, 관성적인 책임 회피, ‘나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는 사고방식에서 자라난다. 인간이 자기 사고를 중지하고 권위에 의존할 때, 전체주의는 일상 속에 조용히 뿌리를 내린다. 이 점에서 아렌트는 철학이 윤리적 사유의 습관임을 강조하며, 전체주의적 구조는 우리가 사유하지 않을 때 도래한다고 경고한다. ‘악은 생각의 부재에서 생긴다’는 그녀의 말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유효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 타인의 지시에 따라 살고 있으며, 스스로의 도덕적 판단을 유보하고 있는가?

감시는 권력의 도구가 아니라 존재 방식이다

미셸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현대 사회를 ‘판옵티콘’의 구조로 설명한다. 이는 과거의 직접적인 강압보다 더 정교하고 은밀한 방식으로 개인을 통제하는 시스템이다. 감시당하고 있다는 인식 자체가 개인의 행위를 내면화하게 만들고, 그 결과 사람들은 자율적으로 권력의 규율을 따르게 된다. 푸코에게 권력은 단순히 위에서 아래로 작동하는 구조가 아니라, 사회 전체에 퍼진 미시 권력의 네트워크다. 병원, 학교, 군대, 심지어 가족 구조 안에서도 권력은 존재하며, 이는 ‘정상성’이라는 이름으로 사회 구성원을 동일하게 만들려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전체주의는 단지 정치 체제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작동 방식에 대한 철학적 사유가 필요함을 시사한다. 우리는 과연 얼마나 자유로운가? 우리의 결정과 사고는 어디까지가 나의 것이며, 어디까지가 내면화된 규율의 산물인가? 푸코의 질문은 단지 정치적 감시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 자체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요구한다. 우리가 스스로를 감시하고 판단하는 메커니즘은 곧 전체주의적 권력이 내면화된 결과일 수 있다.

도구적 이성은 전체주의를 정당화한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근대 이성이 도구화되는 과정을 비판한다. 이성이 더 나은 삶을 위한 성찰이 아니라, 효율성과 계산의 도구로 전락할 때, 인간은 전체주의에 쉽게 굴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치즘은 비합리적 광기였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철저히 계획되고 조직된 시스템이었다. 인간을 숫자로 환산하고, 사회를 효율적으로 조직하려는 기술적 이성이 도리어 파괴적인 체제를 가능케 한 것이다. 이 점에서 전체주의는 무지보다는 ‘지나치게 효율적인 지성’에서 발생한다. 문제는 그러한 이성이 인간의 존엄, 자유, 다양성 같은 비계산적 가치를 배제한다는 데 있다. 오늘날의 디지털 사회, 알고리즘 권력, 통계 기반의 사회정책은 이 도구적 이성의 연장선상에 있다. 우리는 기술의 이름으로 무엇을 합리화하고 있는가? 공공의 효율이라는 명분 아래 사적인 자유를 얼마나 포기하고 있는가? 전체주의는 단지 정치적 억압이 아니라, 이성이 비인간화될 때 도래한다는 아도르노의 통찰은 우리 시대에 더욱 절실하게 읽힌다. 철학은 그 비인간화된 이성에 브레이크를 걸 수 있는 마지막 사유의 방파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