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의 기원을 물질이 아닌 개념으로 본 첫 사상가
기원전 6세기, 고대 그리스의 밀레토스에서 활동했던 아낙시만드로스는 철학이라는 학문이 신화와 마법에서 벗어나 이성과 논리를 중심으로 전개될 수 있음을 보여준 초기 철학자 중 한 명이다. 그의 스승인 탈레스가 ‘물’을 만물의 근원으로 제시한 것과 달리, 아낙시만드로스는 세상의 기원을 구체적인 물질이 아닌 개념적인 원리, 즉 '아페이론(ἄπειρον)'으로 보았다. 아페이론은 ‘무한한 것’, ‘무규정한 것’, 또는 ‘경계 없는 것’으로 번역되며, 그것 자체로는 어떤 특정한 성질도 갖지 않지만 모든 것을 생성하는 근본적인 바탕으로 간주된다. 이는 탈레스의 경험적 접근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자연 현상을 초월적인 근거에서 이해하려는 철학적 전환을 의미했다. 그는 우주의 질서와 변화가 단지 외부 신들의 의지가 아니라, 내재된 원리와 필연적인 균형 작용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이러한 시각은 훗날 자연철학, 형이상학, 과학적 사고방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세상의 균형은 불의와 정의의 반복 속에서 유지된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들이 서로 얽히고설켜 일정한 질서 속에서 생겨나고 사라진다고 보았다. 그는 ‘불의’와 ‘정의’라는 윤리적 개념을 자연 현상에까지 확장해, 어떤 것이 과도하게 지배할 경우 다른 것이 그것을 억제함으로써 다시 평형을 이루는 과정을 설명했다. 이를테면 낮이 너무 길어지면 밤이 찾아오고, 건조한 날씨가 지속되면 비가 내려 균형을 맞추는 식이다. 이러한 논리는 단순한 우주론을 넘어 윤리적 함의까지 내포하고 있으며, 인간 사회 역시 이 원리를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시사한다. 아페이론에서 파생된 사물들은 필연적으로 시간과 변화의 지배를 받으며, 그 끝에는 다시 아페이론으로 돌아가는 순환적 구조를 따른다. 이는 우주의 순환성, 끊임없는 생성과 소멸의 원리를 담고 있으며, 이후 헤라클레이토스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중요한 철학적 자양분이 되었다. 아낙시만드로스는 단지 세상의 시작을 설명하려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변화의 법칙성과 도덕적 균형을 통합하려 한 점에서 독창적이다.
근대 과학과 형이상학으로 이어지는 철학적 유산
아낙시만드로스가 남긴 사유는 고대 철학을 넘어서 현대의 과학과 형이상학에까지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인간이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열어 주었으며, 경험을 넘어서는 추상적 개념—즉, 감각적으로 포착되지 않지만 설명의 근거가 되는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후대 철학자들에게 새로운 질문의 틀을 제공했다. 데카르트나 라이프니츠 같은 근대 철학자들이 세계의 본질을 논리적 원리나 수학적 구조에서 찾으려 했던 시도 역시, 이러한 초기 자연철학자들의 문제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또한 현대 물리학의 우주론적 접근, 예를 들어 ‘특이점’이나 ‘다차원 이론’처럼 물질적 실체 이전의 무규정 상태를 상정하는 사고 역시 아페이론의 현대적 반향이라 할 수 있다. 더불어 존재와 무한에 대한 메타적 성찰은 현대 형이상학과 존재론에서도 계속되는 문제로, 하이데거나 들뢰즈, 바디우 같은 철학자들에게도 일정 부분 아낙시만드로스의 사유가 계승되고 있다. 결국 그는 철학이 감각적 현실을 넘어서 존재의 바탕을 묻는 방식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보여준 선구자였다. 그의 ‘아페이론’은 단순한 고대 개념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개념으로 살아 숨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