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은 자연이 아니라 발명된 기준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정상적인 삶’, ‘정상적인 사고’, ‘정상적인 인간’을 기준으로 삼아 타인을 평가하고 스스로를 조율한다. 하지만 질 들뢰즈는 이러한 정상성의 개념 자체가 권력의 효과라고 본다. 『천 개의 고원』에서 그는 정상이라는 이름으로 구성된 삶의 형태가 실은 특정한 정치·사회적 필요에 의해 고안된 것이라고 말한다. 즉, 정상성은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기준이 아니라, 특정한 시대와 체계가 원하는 주체를 만들어내기 위한 장치다. 예를 들어, 근대 국가가 원하는 ‘건강한 시민’은 생산 가능하고 통제 가능한 존재다. 그런 시민을 양산하기 위해 학교, 병원, 언론, 심지어 가족 제도까지 작동하며, 특정한 방식의 행동과 사고를 ‘정상’으로 포장한다. 들뢰즈는 이것이 바로 권력의 가장 정교한 형태라고 보았다. 통제는 외부에서 강제로 이뤄지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은 스스로 정상이 되기를 갈망하게 되며, 그 과정에서 권력은 내부화된다.
차이를 억누르는 사회는 병든 사회다
들뢰즈의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는 ‘차이’다. 그는 플라톤 이후의 서양 철학이 동일성과 본질을 중심으로 세계를 해석해 왔다고 비판한다. 예를 들어, 어떤 개념이나 존재가 본질적인 원형이 있다고 가정하고, 그것과의 유사성을 기준으로 사물의 가치를 판단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다름’은 항상 결핍된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들뢰즈는 이런 철학적 전통이 사회 전반의 규범에도 깊이 스며들어 있다고 본다. 다양성은 존중되기보다는 ‘이상함’이나 ‘비정상’으로 낙인찍히며 억압된다. 예술, 성적 정체성, 신체, 감정의 표현 등 다양한 영역에서 나타나는 차이들은 제도적 기준에 의해 배제되거나 통제된다. 들뢰즈는 이런 사회를 건강하다고 볼 수 없다고 말한다. 차이를 억누르는 사회는 결국 창조성도 억제하게 되고, 그로 인해 정체되고 병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차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오히려 그 차이에서 삶의 에너지를 발견하자고 제안한다.
정상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창조의 시작이다
들뢰즈는 『안티 오이디푸스』와 같은 저작에서 ‘욕망’이 사회를 구성하는 핵심 동력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 욕망은 제도화된 규범 속에서 길들이기 쉽도록 조작되고 재편된다. 정상적인 욕망은 어떤 것인가? 이성애적인가? 가족 중심적인가? 경쟁적이고 생산지향적인가? 이러한 기준은 자연스럽고 자율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체제에 맞춰진 설계의 결과다. 들뢰즈는 여기에 굴복하지 않고, 욕망 자체를 해방해야 진정한 주체가 된다고 말한다. 그는 주체가 고정된 정체성이 아니라, 끊임없이 탈코드화되고 재구성되는 흐름이라고 본다. 정해진 자리에서 벗어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낼 때, 인간은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다. 들뢰즈의 철학은 결국 존재하는 방식을 바꾸는 일, 그리고 그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촉구한다. 우리는 정상에 맞추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리듬으로 존재함으로써 세상에 새로운 리듬을 더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