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는 20세기 독일 출신의 정치철학자로, 전체주의의 등장과 그 내부에서 발생한 도덕적 붕괴를 날카롭게 분석한 인물이다. 유대계로서 나치 정권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그녀는, 전통적 정치철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인간과 정치, 도덕과 악을 사유하였다. 특히 그녀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통해, 극악한 범죄조차 일상의 행정과 무비판적 복종 속에서 수행될 수 있다는 충격적인 통찰을 제시하였다. 그녀의 이러한 문제의식은 인간이 생각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을 때, 어떻게 파괴적인 체제에 동참하게 되는지를 보여주며, 도덕적 주체로서의 인간 책임을 철학적으로 재정의한다. 또한 그녀는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세 가지 활동—노동, 작업, 행위—를 구분하고, 그중에서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유롭게 등장하는 ‘행위’가 정치적 삶의 본질임을 강조하였다. 이처럼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과 자유, 공적 세계의 회복을 통해 현대 사회에서 정치의 윤리적 기반을 다시 묻는 중요한 철학적 사유를 전개하였다.
악은 괴물이 아니라 생각 없는 인간의 일상에서 비롯된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아렌트의 개념은 1961년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직접 참관하고 쓴 보고서에서 등장했다. 그녀는 아이히만이 잔인한 살인마나 광기가 아닌, 매우 평범한 공무원이었으며, 주어진 명령을 단순히 수행했을 뿐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그는 스스로 생각하지 않았고, 자신이 한 행위의 결과에 대해 성찰하지도 않았다. 아렌트는 이러한 점에서 ‘악’이 특별한 사악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는 태도, 즉 도덕적 성찰의 결여에서 발생한다고 보았다. 이는 전통적인 악의 개념, 즉 내면의 악의지나 타고난 잔인함과는 구별되는 것이며, 일상적인 삶 속에서도 충분히 악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경고한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사례를 통해 현대 관료제와 대규모 체제 속에서 개인이 얼마나 쉽게 도덕적 판단을 유예하고 책임을 전가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며,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인간 본질을 다시 환기시킨다. 결국 그녀는 ‘생각하지 않음’ 자체가 윤리적 위기의 시작임을 강조하며, 철학이 단지 학문이 아니라 인간 삶의 윤리적 방파제가 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인간의 조건: 노동, 작업, 행위로 나눈 삶의 구조
아렌트는 인간의 활동을 세 가지로 구분하였다. 첫째, ‘노동’은 생물학적 생존을 위한 반복적인 활동으로, 인간이 동물적 존재로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조건을 의미한다. 둘째, ‘작업’은 도구와 사물을 만들어내는 활동으로, 인간이 인공적인 세계를 구성하고 영속성을 창출하는 능력이다. 셋째, ‘행위’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오직 인간만이 수행할 수 있는 활동으로, 자유롭게 말하고 행동하며 새로운 시작을 여는 정치적 행위이다. 아렌트는 이 중 ‘행위’를 가장 인간적인 활동으로 보았으며, 공적 세계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존재함으로써 비로소 자유가 실현된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구조는 인간 삶이 단지 생존이나 생산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말과 행동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여는 능동적 주체로서의 측면을 강조한 것이다. 그녀는 근대 이후의 인간이 점점 노동과 생산 중심의 삶으로 축소되며 공적 공간에서의 참여와 자유를 잃어가고 있다고 비판하며,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조건은 바로 타인과 함께 말하고 행동하는 공간의 회복에 있다고 보았다. 이는 오늘날 정치적 무관심, 소비주의, 자기 폐쇄적 삶의 양상에 대한 비판적 사유로 이어진다.
정치적 자유와 공적 공간의 회복을 위한 사유
아렌트는 자유를 단순히 내면적 상태나 권리 보장의 개념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자유는 본질적으로 ‘공적 공간에서 함께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며, 타인과 함께 존재할 수 있는 장이 보장될 때만이 실현 가능한 것이었다. 이러한 자유는 고립된 개인의 권리가 아니라, 공동체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함께 세계를 구성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자유이다. 그녀는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를 이상적인 공적 공간의 예로 들며, 시민들이 말하고 논의하며 공동의 세계를 만들어 갔던 경험을 정치의 원형으로 삼았다. 현대 사회는 이러한 공간을 점점 상실하고 있으며, 정치적 논의보다는 행정, 기술, 소비에 의해 삶이 지배당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아렌트는 이러한 현실을 비판하며, 인간이 다시금 ‘행위의 주체’로 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정치란 삶을 함께 살아가기 위한 실천이며, 그것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획득한다는 점에서 그녀의 철학은 공동체의 윤리적 기반을 회복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그녀의 사유는 정치의 본질, 인간의 존엄, 사회적 책임이라는 주제를 통해 오늘날 민주주의와 시민성의 위기를 다시 성찰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