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너’와 ‘나-그것’이라는 두 가지 관계
마르틴 부버는 인간이 세계와 맺는 모든 관계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했다. 하나는 ‘나-그것(I-It)’의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나-너(I-Thou)’의 관계다. ‘나-그것’ 관계는 우리가 사물을 대상으로 인식하고 활용하는 방식이다. 이 관계는 목적지향적이며, 타인을 수단이나 도구로 대하는 기능적 관계를 포함한다. 현대 사회에서 대부분의 인간관계가 이 유형에 속한다. 반면, ‘나-너’ 관계는 타인을 온전히 하나의 존재로 대면하는 만남의 관계다. 여기에는 대상화나 목적이 개입되지 않으며, 존재 대 존재의 직관적인 만남만이 존재한다. 부버는 이러한 ‘나-너’의 순간이야말로 인간이 진정으로 존재하게 되는 시간이라고 강조했다. 이 관계는 지속되기 어렵고 순간적이지만, 그만큼 본질적이며 인간 존재의 근본을 드러낸다. ‘나-너’ 관계를 통해 우리는 타인을 넘어 절대자, 즉 신과의 관계까지 확장될 수 있다고 그는 보았다.
대화를 통한 존재의 탄생
부버의 철학에서 대화는 단순한 정보 교환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이다. 그는 인간이 진정한 ‘나’가 되기 위해서는 ‘너’와의 진실된 만남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때 ‘너’는 특정한 사람일 수도 있고, 자연, 예술, 심지어 신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존재를 전인격적으로 마주하고 응답하는 태도다. 부버는 이와 같은 응답의 태도 속에서 인간은 자아 중심성을 벗어나고, 타자와 더불어 존재하게 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대화는 양쪽 모두가 변화되는 상호적인 사건이며, 관계 그 자체가 주체성을 생성하는 근거가 된다. 부버에게 인간 존재는 고립된 개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타자와 만남을 통해 갱신되고 구성되는 역동적인 존재다. 따라서 철학이란 단순한 사유의 활동이 아니라, 삶의 태도와 관계의 방식에 대한 물음이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핵심 메시지다.
현대 사회에서 ‘나-너’ 관계가 갖는 의미
오늘날 우리는 디지털 네트워크와 기술 매개 소통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지만, 부버가 말한 ‘나-너’의 만남은 오히려 희귀한 것이 되었다. 인간관계는 기능적으로 변했고, 타인은 종종 정보나 소비 대상으로 전락한다. SNS에서의 소통도 진정한 만남이라기보다는 자기표현과 이미지 관리의 장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시대일수록 부버의 ‘나-너’ 철학은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다시 타인을 하나의 전체적인 존재로 대면할 수 있는 용기와 개방성을 회복해야 한다. 그것은 곧 인간다움의 회복이며, 공동체의 재구성과도 연결된다. 부버는 신과의 만남 역시 ‘나-너’의 관계에서 출발한다고 보았기에, 그의 철학은 종교적 성찰과도 깊이 닿아 있다. 결국 ‘나-너’의 철학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존재론적 근거이자, 관계의 윤리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