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는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지평의 융합이다
가다머는 해석을 단순히 텍스트나 타인의 의도를 파악하는 기술적 행위로 보지 않았다. 그는 이해를 인간 존재의 가장 본질적인 구조로 간주하면서, 이를 존재론적 해석학으로 확장시켰다. 이해란 ‘지평의 융합(Fusion of Horizons)’으로서, 독자의 현재와 해석 대상이 속한 과거의 세계가 서로 충돌하고 교차하면서 새로운 의미가 생성되는 과정이다. 이때 ‘지평’이란 단지 시야가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전체적인 인식 틀을 의미하며, 이 두 지평이 만나야만 이해가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가다머는 우리가 전통, 역사, 예술 작품을 해석할 때 완전한 객관성이나 중립성은 불가능하며, 오히려 자기 입장의 한계와 마주할 때 더 깊은 이해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이해는 고정된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살아 있는 대화의 장에서 의미를 창조해가는 행위다.
선입견은 이해의 장애물이 아니라 조건이다
전통적으로 철학에서 선입견은 오류나 편견으로 여겨졌고, 이를 제거함으로써 참된 이해가 가능하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가다머는 이러한 입장을 비판하며, 선입견은 인간 이해의 불가피한 전제이자 출발점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전통, 언어, 교육, 역사 등 다양한 문화적 배경 속에서 형성된 선입견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며, 이 없이 어떤 해석도 가능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 선입견을 비판 없이 따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만남과 충돌 속에서 반성하고 수정해나가는 과정이다. 그는 이를 통해 해석의 주체가 결코 중립적이지 않으며, 해석 과정은 항상 과거와 현재, 자기와 타자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런 점에서 가다머의 해석학은 해석자를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해석자 자신의 역사성과 태도를 철저히 성찰하는 철학으로 나아간다.
해석은 언어를 매개로 한 대화적 사건이다
가다머에게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존재가 드러나는 방식 그 자체였다. 그는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는 존재라기보다, 언어 속에서 인간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해석이란 본질적으로 언어적 사건이며, 말해진 것과 들려지는 것 사이에서 의미가 생성되는 대화의 공간이다. 이때 해석자는 단지 수동적으로 정보를 받아들이는 존재가 아니라, 언어 속에서 타자와 세계를 향해 능동적으로 나아가는 존재로 기능한다. 특히 예술 작품이나 문학, 고전 텍스트를 읽는 행위는 단지 과거를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독자가 자신의 이해 지평을 넓히고 변형시키는 창조적 사건이 된다. 가다머는 이러한 해석의 과정을 통해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를 초월하고, 타자와 세계를 새롭게 이해하며, 그 속에서 진정한 소통과 화해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보았다.